Episode 05
울타리를 넘어 대화하기
김대곤 × 김시준
“자기만의 색을 인정해주는 일이 필요해요”
10월에 개막한 청소년극 <더 나은 숲>은 양으로 자란 늑대 퍼디난드와 그의 주변 동물들을 통해 진정한 나를 찾는 과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퍼디난드는 돌아오기 위해 스스로 울타리를 넘고, 자신들의 기준으로 그를 대하던 양부모는 담담히 기다릴 줄 알게 됩니다. 누구나 제 앞의 장애물을 하나씩 넘으며 자랍니다. 상처와 절망 속에서도 더 나은 숲을 찾으면서요.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의 주도권이 어디에 있는지입니다.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이자 부모와 자녀 사이의 이야기이기도 한 <더 나은 숲>을 부자가 함께 봤습니다. 현재 ‘청소년17인’으로 활동 중인 김시준과 그의 아버지 김대곤의 대화를 옮깁니다.
(본 인터뷰는 공연 관람 후 작품의 인상을 직접 적은 키워드를 바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Q1
작품에 대한 인상을 하나씩 써보기로 했는데, 시준이가 ‘정체성’을 적었어요. 어떤 이유에서였어요?
김시준
주변에서 양으로 살아온 퍼디난드에게 늑대라고 해요. 그 얘기를 듣고 퍼디난드가 늑대에게 갔는데, 스스로는 양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이 인상적이어서 ‘정체성’을 적었어요. 퍼디난드의 고민이 어른과 청소년 사이의 저와도 잘 맞는 것 같았어요.
Q2
한 사람에게도 여러 가지 면이 있잖아요. 집과 국립극단에서의 ‘나’는 다른가요?
김시준
공간,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해요. 편한 건 집에서의 김시준이고, 솔직한 건 친구들 사이의 김시준. 국립극단에서의 김시준과 학교에서의 김시준도 다른데, 국립극단의 김시준이 좀 더 꾸밈없는 것 같아요.
동물에 빗대어 청소년의 성장통을 그린 <더 나은 숲>(ⓒ국립극단)
Q3
다음 키워드는 두 분이 비슷하네요. ‘기준’과 ‘고유의 늑대, 양만의 방식’을 써주셨어요.
김대곤
시준이에게 기준이 뭘까를 생각해보면, 뭔가를 하려고 할 때 자꾸 껴드는 게 아닐까 싶어요. 하다못해 영화를 보려고 해도 15세 관람가, 18세 관람가 같은 게 있잖아요. 그때를 겪고 있어서 ‘기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문장은 다른데 ‘고유의 늑대, 양만의 방식’과 비슷한 내용일 수 있어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김시준
늑대들은 더 나은 숲으로 가고 싶어 하지만, 멜라니는 오히려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잖아요. 각자 살아온 환경에 따라 좋고 나쁨의 기준이 달라진다고 느꼈는데, 아빠가 쓴 걸 보고 되게 비슷한 생각을 했다고 느꼈어요.
Q4
서로 다른 기준 때문에 의견 차이가 있는 경우가 있나요?
김시준
전 기준 자체를 싫어해요. 하지만 약속은 지켜요. 기준이랑 약속은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약속은 여러 명의 각기 다른 기준을 모아서 최대한 모두가 지킬 수 있게 정한 거니까 지켜야죠. 하지만 기준은 자기 생각을 남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려는 경우가 있어서 안 좋아해요.
김대곤
아이가 파마하러 갔을 때 미장원 선생님이 제 생각을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런데 저도 이 나이대 멋 부리는 것에 관심이 있었거든요. 나는 해놓고 남은 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도 문제잖아요. 작품 전체를 통틀어서 꿀벌이라고 생각하는 곰의 대사가 기억에 남았거든요. ‘난 날고 있어. 그냥 공중에 뜨질 않은 거지.’ 사람은 각자의 기준으로 상대를 보죠. 그 곰은 정말 열심히 날고 실제로 아주 미세하게 떴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내가 보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좀 더 열심히 날아봐’라거나 ‘최소한 몇 센티는 날아야 날았다고 인정한다’ 이렇게 보는 게 아닐까. 그런 게 세상에 많아요. 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상대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내 기준으로 판단하거나 때로는 자기도 갖지 못한 더 높은 기준을 들이밀기도 하죠. 관계에서 터무니없는 오해가 생길 때도 있는데 저는 해명하지 않아요. 보이는 대로 보게 놔둬요. 경험이 쌓여서일 수도 성향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그게 별 영향을 주지 않아요.
Q5
자신을 꿀벌이라고 생각하는 곰을 보고 어떤 쪽이라고 생각했어요?
김시준
공연을 두 번 봤거든요. 첫 공연 때는 꿀벌인데 남들이 곰으로 본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공연을 한 번 더 보니까, ‘얘네들이 실제로 존재했던 걸까?’ 싶더라고요. 양으로 자란 퍼디난드가 자신이 늑대라는 걸 알고 충격이 너무 커서 자신과 같은 애들을 상상한 것일 수도 있겠다, <파이 이야기>처럼 전체가 이야기인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해요. 학교에서 얼마 전에 회의주의에 대해 배웠거든요. 그걸 배운 후로는 모든 걸 의심하게 돼요. (웃음) 실제로 존재하는 건가.
“울타리는 가두는 게 아닌 보호해주는 것이어야 해요.”(ⓒ국립극단)
Q6
<더 나은 숲>에서 여러 기준이 등장하는데, 시각화한 것이 울타리가 아닐까 싶어요.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양들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김시준
울타리는 가둬놓는 게 아닌 보호해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가고 싶으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나갈 수 있어야 하고, 오고 싶으면 다시 들어올 수 있는 곳. 퍼디난드도 말하잖아요. 자기는 떠나는 게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서 나가는 거라고.
김대곤
울타리를 양들이 만든 게 아니잖아요. 어쩌면 양들은 원하지도 않았겠죠. 그럼 울타리를 만든 이유는 뭘까요. 양을 잃지 않기 위해서고, 양 주인 입장에서는 그 안에서 양들이 충분히 성장하고 배우길 바란 게 아닐까. 저는 큰 강처럼 아이를 키우고 싶거든요. 본인이 원하면 약간 빠져나가도 되고, 물살을 거슬러도 돼요. 그런데 제가 좁은 강이면 저랑 자꾸 부딪힐 거 아니에요. 그래서 저는 큰 강이 되고, 아이는 이 안에서 어떻게 해도 상관없어요. 아이의 행동을 두고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지 않아요. 그냥 지금 그런 시기구나 정도로만 봐줘요.
김시준
어릴 때는 울타리가 학교라고 생각했어요. 계속 가둬놓고 공부해라 그러니까. 요즘은 시간이 울타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시간이라는 게 확실히 존재하는 게 아니라 흐름을 규칙으로 정해둔 거잖아요. 하지만 시간을 느끼는 건 상대적이라고 보거든요. 어떤 애는 같은 시간에 더 빠르게 받아들이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오래 걸릴 수도 있죠. 그 차이를 서로의 기준에 맞춰서 정해야 되는데, 한 가지 기준에 맞춰 버리니까 문제가 생겨요. 그래서 시간이라는 게 저에게는 울타리 같아요. 보호받아야 하는데 가둬버린 게 아닐까.
Q8
시준이의 속도는 빠른 편인가요? 느린 편인가요?
김시준
둘 다 아닌 것 같아요. 존재하는 건 지금 이 순간뿐이에요. 미래는 계속 반복되는 현재이고 과거도 지나간 현재일 뿐이에요. 과거에 붙들려 있으려 하지 않고, 먼 미래를 바라보면서 계획하지도 않는 성격이에요. 그냥 닥치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놔두는 스타일?
Q9
아버님은 늙은 늑대의 대사 “둘 다 우리에게 필요해”도 적어주셨어요. 어떤 점에서 이 대사가 인상적이셨나요?
김대곤
굉장히 이기적인 문장이잖아요. 그 대사가 둘이 싸워서 상처 입으면 나에게, 그리고 우리 조직 전체에 좋지 않다는 말처럼 들렸어요. 어린 늑대 둘이 싸우는데, 이들이 왜 싸우는지 어떤 감정인지에 관심이 없어요. 싸움의 맥락은 돌보지 못하는 거죠. 생존 외에는 다 포기한 것 같았어요. 생존을 위해 주어진 정보 안에서 가능하면 빨리 결론을 내려야 하니까 자의적으로 판단할 때가 많아요. 하지만 그 안에 상처 입는 이들이 분명히 있잖아요.
김시준
각자의 생각이 있으니까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있어요. 둘 다 필요하고 맞춰가려면 누군가가 양보를 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양보하는 입장에서는 많은 사람을 위해 내 생각을 바꾸는 과정이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어요. 전체로 보면 한 사람 때문에 모두가 바꿀 순 없다고 생각하는 지점도 생겨요. 이런 상황에서 저는 보통 양보를 하려고 해요.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생각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학교에서 반장이에요. 다수결을 하기 전까지는 한 명이라도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조율하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 돼요.
Q10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 같은 게 있나요?
김시준
제 공간을 침범하는 걸 매우 싫어해요. 선이 확실히 있어서 그 선을 넘으면 매우 화가 나는 타입인데, 그 바깥에서는 관련이 있어도 딱히 상관하는 편은 아니에요.
”자기만의 색을 인정해주는 일이 필요해요.”(ⓒ국립극단)
Q11
할아버지 양은 ‘전통’을 고집하는데요. 전통이라는 이름의 기준도 문제가 될 때가 있죠.
김대곤
전통이라는 단어의 방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다른데, 윗세대가 보는 전통과 저희 세대와 아이들 세대가 생각하는 전통이 굉장히 다르거든요. 할아버지 양이 어린 퍼디난드에게 전통이라는 명분으로 강요하잖아요. 늑대를 늑대로 키우지 못하고 양으로 둔갑시켜서 키울 수밖에 없는 상황 자체도 일종의 전통일 수 있죠. 저도 주는 입장이다 보니 전통이라 불리는 것들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생각하게 돼요. 그것들을 잘 지키면 그 울타리 안에서는 안전할 수 있거든요. 안정적이라는 말이 좋은 말이기도 하지만 위험한 말이기도 해요. 예측 가능하다는 면에서 ‘뻔하다’는 것이 될 수 있으니까.
김시준
사실 할아버지가 마음에 들진 않았어요. 전통이라는 것은 원하지 않으면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꾸 강요하니까 싫었어요. 그런데 저도 동생한테 똑같이 하는 걸 보면 (웃음) 할아버지가 제일 싫지만 닮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친구 중에 위로 형이 있고 아래로 동생 둘이 있는 애가 있어요. 걔랑 얘기하다 보면 아래로 잔소리도 하면서 위에서 잔소리도 듣거든요. 동생의 입장도 이해는 가는데 동생보다 위에 있다는 이유로 자꾸 ‘꼰대’처럼 잔소리를 하는 내가 될까 봐 무서워요.
김대곤
그건 ‘꼰대’가 아니라 그냥 생존을 위한 보수성일 뿐이야.
Q12
암늑대의 “왜 내 생각을 묻지 않아?”라는 대사도 언급해주셨어요.
김대곤
아주 어릴 때부터, 한 여자를 두고 남자 둘이 결투할 때 늘 궁금했어요. 저 여자는 둘 중 누가 이겨도 상관없나? 그냥 그걸 따르는 건가? 제도가 그렇고 사회적 관습이 그렇게 되어 있고 목숨까지 걸고 했으니까? 한 사람의 감정은 왜 저렇게 무너지나 싶어요. 저는 와이프도, 딸도, 엄마도 있거든요. 그런 입장에서 여러 생각이 들기도 했고, 더 나가면 우리 아들은 저렇게 어리석은 짓 안 했으면 싶고. (웃음)
Q13
청소년극 중에서도 부모의 입장이 드러나는 작품인데요. 작품을 보고 공감하거나 고민한 부분이 있으신가요?
김대곤
양부모들이 퍼디난드를 만나기 전에 아이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택하려고 하잖아요. 저한테는 이 작품이 벗어나지 못한 제도들에 대한 이야기구나 싶었어요. 전통, 기준, 울타리 같은 하나의 틀을 계속 고집하면서 살아간다면 시준이 같은 캐릭터는 굉장히 버겁고 힘들 수 있겠구나. 유전적 원인인지 보고 자란 게 있는 건지 저랑 비슷한 면이 분명히 있을 거거든요. 시준이는 자기 색이 좀 뚜렷하다 그래야 되나? 그런데 그걸 잘 티를 안 내요. 그래서 차이가 생겼을 때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는 아이니까 자기만의 색이 있는 걸 인정해주는 일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인터뷰이에 대하여 현재 중학교 3학년인 김시준은 ‘청소년 17인’으로 국립극단과의 만남을 시작했다. 아버지 김대곤은 간섭하지 않는 태도로 아들과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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