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04
세대의 언어를 연극으로 통역하기
문원섭 × 임서진
“청소년 관객에게는 그들만의 문화가 있어요”

‘라이브’의 특성을 가진 공연예술은 관람을 넘어 그 자체로 하나의 체험이 되기도 합니다. 관객은 함께 숨 쉬는 배우를 통해 이야기 속으로 뛰어들고, 이야기 속 다양한 시청각 요소로 작품 속 세계를 현실로 느끼기 때문인데요. 하나의 연극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이들의 세심한 작업이 필요합니다. 관객의 눈에는 잘 띄지는 않지만, 작품의 공기를 만드는 이들이 있어요. 공연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기획하고 조율하는 무대감독과 사운드를 통해 자연스럽게 관객의 몰입을 돕는 사운드 디자이너도 그중 한 사람들입니다.

<비행소년 KW4839>, <말들의 집> 등 5편 이상의 청소년극을 만들어온 문원섭 무대감독과 임서진 사운드 디자이너를 만나 청소년극의 스태프이자 관객으로서의 경험을 들었습니다.

문원섭, 임서진
Q1
처음으로 작업하신 국립극단 청소년극은 무엇이었나요?
문원섭
2012년 <레슬링 시즌>부터 함께 했어요. 당시 조연출이었던 최여림 연출가에게 연락을 받았는데, 무대감독 이상의 영역까지 커버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원작의 특성을 살리고 싶어 해서 원본에 가깝게 재번역하고 한국화하는 과정을 정리하는 일도 같이했어요.
임서진
저는 <비행소년 KW4839>였어요. 2013년 쇼케이스 준비하던 때로 기억하는데, 여신동 연출이 밤 10시에 전화해서 비행기 이륙하는 소리가 급하다고 했어요. (웃음) 작품 제목도 모르고 얼마나 가까이에서 들리는 비행기인지 정도만 대충 듣고 소리를 보냈는데, 그게 <비행소년 KW4839>였다는 건 이후에 계약하면서 알았어요.
청소년의 불확실성을 ‘여행’이라는 콘셉트로 담은 <비행소년 KW4839>(ⓒ국립극단)
Q2
<비행소년 KW4839>에 청소년 복장을 한 배우들이 어른의 말을 립싱크하는 장면이 있죠. 임서진 디자이너님께서 이 장면을 청소년극에서 인상적인 작업으로 소개하신 적이 있는데요. 어떤 이유에서였을까요?
임서진
‘꼰대’ 마인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이었는데, 모두가 포복절도했죠. 사실 작업은 쉽지 않았거든요. 녹음된 내용에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있는 추임새나 목을 다듬는 소리 같은 것까지 들어가 있어요. 그걸 배우들이 래퍼처럼 타이밍을 맞춰서 연습했거든요. 배우들이 빙의된 듯 발화할 때 청소년들이 깔깔 웃는 걸 보니 되게 짜릿하더라고요. 아이들이 매일 듣는 잔소리고 누군가의 짜증일 상투적인 발화들이었는데 왜 이렇게 웃긴가 생각해보니 나도 들어본 적 있는 말인 거예요. 얼마 전까지도 저런 잔소리에 짜증을 냈던 것 같은데 ‘아니 어느새 나도 이런 얘기를 하고 있잖아’ 싶어 뜨끔하기도 했죠.
Q3
국립극단 외에도 다양한 작품에 참여하고 계시는데요. 청소년극은 기존의 연극과 많이 다른가요?
임서진
외부에서도 청소년이 주인공인 작품을 할 때가 있지만 굳이 청소년극이라고 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는 ‘청소년’이라는 관객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돼요. 실재하는 청소년들이 창작 단계에서부터 협업하면서 서로의 경험이 휘발되지 않고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도 들고요. 청소년극이 성인과 청소년 사이를 통역하는 것 같아요. 청소년 관객들과 공연을 보면, 공연 초반에는 ‘어디 한번 보자’ 같은 태도가 느껴지거든요. 그러다가도 이들이 어느 순간에 배역과 극에 흡수돼서 관객과 관객 사이에서도 소통하는 느낌을 받아요. 그런 순간이 매번 청소년극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문원섭
일단 짧죠. 청소년들이 공연을 온전히 즐길 수 있게 하는 요소 중 중요한 부분이 시간이기도 해요. 몰입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까요. 짧은 시간에 여러 얘기를 담기 때문에 되게 압축적이죠. 특히 <레슬링 시즌>이나 <비행소년 KW4839>, <죽고 싶지 않아>처럼 관객과 직접 소통하고 그 반응을 볼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에요. 사실 제가 공연 중 제일 자주 보는 건 에어컨이에요. 덥거나 지루하면 부채질이 나와요. 확실히 솔직하고 빨라요.
관객 의견을 직접 듣는 방식의 포럼 시어터 <레슬링 시즌>(ⓒ국립극단)
Q4
말씀하신 것처럼 청소년극에는 ‘청소년 관객’이 명확하게 존재하고 있는데요. 청소년 관객만의 특징이 있을까요?
문원섭
관객은 섞어두면 똑같아요. 대신 청소년 관객이 단체관람을 할 경우에는 그들만의 문화가 생겨나요. <빨간 버스> 공연 때 암전이 됐는데 바닥에 휴대전화 불빛이 쫙 드러나는 거예요.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배우들 퇴장할 때 넘어질까 봐 그렇게 한 거래요. 그런 식의 장난인 듯 배려인 듯한 상황이 만들어지기도 하죠. <레슬링 시즌>은 서울 공연 이후에 꽤 많은 지방의 학교에서 공연이 됐거든요. 극장이 아니고 학교 체육관에서 공연되는 거라 반응이 훨씬 더 적극적이었어요.
Q5
지방 관객들도 많이 보시겠어요.
문원섭
서울보다는 극장이 크다 보니까 여러 팀이 단체관람을 하죠. <비행소년 KW4839> 포항 공연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중학생과 고등학생 관객이 같이 있었어요. 오프닝을 보고 중학생들은 ‘와!’ 하는데, 고등학생은 거기에 별로 반응하고 싶지 않으니까 ‘우~’하고, 반대로 고등학생들이 좋아하면 중학생들이 ‘에이~’ 이러기도 해요. 서로의 반응과 반응의 싸움이랄까. 사실 연극은 연극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 봐요. 특히 국립극단 작품처럼 티켓이 제한된 공연에는 마니아들이 있고 그분들이 주로 보기 때문에 되게 전문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관객을 청소년 관객, 지방 관객으로 넓히면 아주 날 것을 보게 될 때가 있죠.
Q6
무대감독님이 청소년 관객을 전체로 봤다면, 디자이너님은 중학생 딸과 공연을 자주 보신다고 들었어요. 아이와 처음으로 같이 본 작품이 무엇인가요?
임서진
<죽고 싶지 않아>를 2016년 초연부터 참여했는데, 당시는 딸이 초등학생이어서 볼 수가 없었어요. 제가 워낙 좋아했던 작품이라 한 번만 더 해서 우리 딸도 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작업을 했고, 2019년도에 이루어져서 너무 기뻤어요. 사실 세 차례 다 참여하면서도 커튼콜 때 무대에 올라간 적이 없어요. 그런데 딸이 나가자고 해서 함께 무대에 올라갔는데 진짜 환희가 느껴지더라고요.
Q7
공연을 관람한 후에 작품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기도 하시나요?
임서진
딸이 공연을 보면 꼭 팬아트를 그려요. 놓쳤던 디테일과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하고요. <발가락 육상 천재>를 보고서는 달리기 1등을 전학생한테 뺏기고 따돌림받는 호준이를 되게 동정했어요. 쟤는 얼마나 절실했었냐며. 근데 좋아하는 캐릭터로는 맨날 꼴찌 하는 은수를 꼽았어요. 여러 인물에 공감하고 자기에 대입해서 비슷한 모습을 찾더라고요. <영지>도 같이 봤는데, 어느 날은 EBS에서 해주는 <말괄량이 삐삐>를 보고 “쟤가 영지지?” 하더라고요. 삐삐를 모를 텐데. 제가 <영지>를 봤을 때의 감각이 어렸을 때 <말괄량이 삐삐>를 봤던 느낌이었거든요. 다른 주인공을 보고도 같은 걸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이방인을 소재로 한 토니 그래함 연출의 <노란 달>(ⓒ국립극단)
Q8
스태프로 참여했지만, 관객으로 좋아했던 작품도 있으신가요?
문원섭
저는 토니 그래함 연출가 작업이 다 인상적이었어요. 물론 우리나라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번역이나 설정의 어색함과 정서적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어요. <노란달>에는 아랍계 소녀가 나오죠. <타조 소년들>도 청소년극이지만 계급 문제를 다뤄요. 이런 작품들이 <비행소년 KW4839>나 <죽고 싶지 않아>처럼 열광적인 관객의 반응을 끌어내지 않더라도, 관객을 숙고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고 느껴요. 청소년극이라고 해서 청소년만 대상으로 하는 작품이 아니잖아요. <빨간 버스>를 할 때 박근형 연출가가 그런 말을 했어요. 우리 안에 다 청소년이 있으니 모든 연극이 다 청소년극이라고. 연극은 인간이 세계에 던지는 질문이라고 봐요. 토니 그래함 연출의 작품을 볼 때 ‘청소년극’이라는 단어를 빌어서 더 진지하고 심도 있는 질문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임서진
청소년 권장소설도 그렇잖아요. 『아몬드』, 『위저드 베이커리』가 청소년 카테고리로 분류되다 보니 성인한테는 안 맞나 해서 읽지 않았거든요. 읽어봤더니 그런 경계가 뚜렷하지 않더라고요. 진정 재밌는 것에는 경계가 없이 다 통하는 것 같아요. 저도 <타조 소년들> 재밌게 봤어요.
Q9
특별한 경계가 없음에도 ‘청소년극’이라는 단어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문원섭
성인 관객들도 여기서는 마음의 때를 좀 덜고 당신 안에 있는 청소년의 모습으로 공연을 좀 봐주십사 하는 마음이 있는 것 아닐까요? 우리 안에도 여전히 그런 모습이 남아있고, 어떻게 보면 거기서 성장도 안 한 것 같기도 하고. (웃음)
임서진
외부에서 작업한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한다>도 학창 시절을 다루거든요. 관객들이 연극 얘기는 한 10%만 하고 나머지는 다 자기 고등학교 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청소년기에는 제 안에서 생기는 감정과 문제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만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 같거든요. 청소년극을 본다는 건 객관화된 언어로 그 시간을 반추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죽고 싶지 않아> 중 청소년의 뇌를 형상화한 장면(ⓒ국립극단)
Q10
청소년극을 만드는 스태프이자 관객으로서의 작업이 개인의 삶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시나요?
문원섭
‘꼰대’ 의식은 좀 사라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사실 저는 청소년과는 나이적으로도 거리가 있어서 만날 기회가 드물지만,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한 사회초년생들과는 작업자로 만날 때가 있어요. 또래에 비하면 이들과 거리감을 줄일 방법이 훨씬 많지 않을까.
임서진
<죽고 싶지 않아>에 뇌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어요. 청소년의 전두엽이 50%가 재 세팅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조절 능력이 떨어지고 감정 기복이 수시로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게 정상이라고. 중학교 2학년이 된 딸이 온라인 수업을 하면서 계속 그림을 그려요. 그런데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더라고요. 그럴 때 그 장면을 얘기하면서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해줘요. 동등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늘어났어요. 최근에는 “우리 반에 엄마가 있어서 엄마가 내 친구였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기뻤어요.
Q11
코로나19로 라이브성이 강한 공연예술의 미래가 불투명하기도 했잖아요. 앞으로의 연극은 계속될 수 있을까요?
임서진
사운드 작업을 하다 보니 ‘몰입’에 대한 생각이 많아요. 최근 실감 나는 공간 음향 효과를 위해 여러 기술을 모색하는데, 그것의 원형이 연극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건 지금 현장에서 실제로 그 소리가 발생하고 있으니까요. 일정한 공간에 와서 순간을 공유하는 그 자체가 연극이 아닐까 싶어요. 단지 1시간 반 정도밖에 안 되지만, 누군가에게는 일생의 방점처럼 찍힐 수 있는 특별한 체험. 아이맥스, 돌비 애트모스 채널, VR의 시대가 와도 결국 연극을 추구하는 것 같아요.
문원섭
공연예술은 라이브로 사람을 직접 만난다는 게 제일 중요해요. 비단 무대와 객석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저는 관객끼리 만나는 작업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나의 반응, 타인의 반응을 아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이런 관계성이 다른 세계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는 데 도움이 돼요. 그래서 계속 살아남고 오랫동안 같이 해야 할 장르라고 생각해요.
인터뷰이에 대하여

무대감독 문원섭과 사운드디자이너 임서진은 다섯 편 이상의 국립극단 청소년극에 참여했다. 이외에도 국내외 다양한 방면에서 활발하게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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