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02
함께 고민하고 탐험하기
권지윤 × 황웅비
“관객은 기꺼이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들이에요”

청소년극을 보고 있으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이 작품에는 ‘지금’ 청소년의 고민이 ‘진짜’ 담긴 걸까? 국립극단 청소년극에 한정한다면, 이 질문의 답은 ‘그렇다’ 입니다. 매해 다양한 청소년이 작품과 연계된 예술교육을 경험하고, 예술가와 만나 작품의 씨앗을 만들기 때문이죠. 작품 전체를 봤을 때 이들의 참여는 일부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작품의 시작이자 중심에 청소년이 있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권지윤과 황웅비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3년간 국립극단 어린어청소년극연구소에서 다양한 청소년 대상 프로젝트에 참여했어요. 16살이었던 아이들은 이제 21살이 되었습니다. 청소년기에 만난 청소년극은 이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요?

황웅비, 권지윤
Q1
국립극단과의 첫 인연을 기억하나요?
황웅비
14살이었던 2014년에 사촌 형을 따라 처음 왔는데, 이렇게 빨간 건물만 모여있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충격받았어요. ‘내가 좀 다른 곳에 와 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권지윤
저는 2016년에 청소년예술가탐색전(이하 청예탐)으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많이 놀랐어요. (황)웅비 같은 사람이 엄청 많은 거예요. 예술가가 되고 싶은, 열정이 엄청난 사람들이요. (웃음) 저는 퍼포머로서의 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처음에는 여기와 동떨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 상황을 주변 어른들이 알아채고 여러 방면으로 신경 써주셨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었던 때라 활동 자체에 스며들게 되었어요.
Q2
함께 참여했던 프로젝트가 2016년 청예탐 ‘춤_몸! 그 이상의 언어들’이었죠?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권지윤
그때의 저는 모든 걸 싫어할 때였어요. 목소리도 되게 안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활동 중에 문장을 뱉는 과정이 있었어요. 연기하고 싶어 하는 언니 오빠들이 많았는데, 다들 제 목소리가 좋다고 하는 거예요. 엄청 감동받았고, 제 목소리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사실 이후에 지역 방송국에서 라디오 같은 것도 했거든요. 아마 그 순간이 없었으면 절대 못 했을 거예요. 다른 작업을 할 수 있게 한, 엄청 큰 순간이었어요.
황웅비
매 순간이 뜨거웠다고 생각해요. 퍼포머로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신체에 대해 원 없이 탐구하고 경험하고 배울 수 있었어요. 배우를 꿈꾸고 있었지만, 연기가 아니어도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표현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도 국립극단 활동을 통해서 알게 됐어요.
Q3
어떤 방식으로 황웅비라는 사람을 더 표현했나요?
황웅비
저는 중학교 2학년 이후로 공부를 포기했어요. (웃음) 글도 많이 써본 적이 없고. 그런데 여기서는 내 생각을 말로 하고, 말을 정리해서 글로 쓰기도 해야 했어요. 보령에 살고 있어서 매주 보령과 서울을 오갔는데, 활동 이후에 떠오르는 감정들을 A4 용지 2~3페이지씩 썼어요. 2018년도 청예탐을 끝내고는 ‘참으로 행복한 꿈을 꾼 것 같아. 깨는 게 무서울 정도로 행복한 꿈. 하지만 꿈에는 끝이 있고 그 안에 있는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살잖아.’ 라고 썼네요. (웃음) 지금 생각하면 낯부끄럽지만, 굳이 부정을 안 하는 건 그런 시기가 있어서 지금처럼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제가 만들어졌기 때문이에요.
배우와 청소년17인이 함께 한 <죽고 싶지 않아> 워크숍 현장(ⓒ국립극단)
Q4
2016년부터 2018년까지 꾸준히 참여했는데, 어떤 점이 인상적이라서 3년간 활동한 거예요?
권지윤
우리들끼리 ‘학교 말고 여기 다니고 싶다’라는 말을 자주 했어요. 사실 저는 기분에 대한 것보다는 상황을 진단하고 분석하려는 말을 많이 해요. 그런데 여기서는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의 기분을 주로 묻더라고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질문들을 통해 감정을 돌아보게 되고, 질문을 먼저 해주니 저희도 편하게 답하고 질문할 수 있었어요. 동등해지는 느낌이 좋았어요. 이곳에서의 활동이 튼튼한 자기 복합성을 구축해준 것 같아요. 학교에서 시험을 못 봐도 크게 좌절하지 않는 거죠. 국립극단에서의 자아가 단단하게 있으니까.
황웅비
저는 아예 ‘내 학교는 여기다’라고 생각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어른들이 저희 얘기를 들어주는 몇 안 되는 곳이고, 제가 한 이야기가 영향을 끼친다는 것 자체에서 자존감이 높아지기도 했어요. 작업일지가 프로그램북에 들어가는 걸 보면서 금요일의 활동이 우리끼리 경험하고 떠드는 것이 아니라, 공연을 만드는 사람들과 관객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걸 알게 됐어요. 교육을 받기 위한 자리라기보다는 무언가를 나누기 위한 자리였달까요.
Q5
작품의 일원이 되었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나요?
황웅비
2017년 ‘예술가청소년 창작벨트’(이하 창작벨트) 작업으로 <사물함> 작가님을 만났는데, 당시 신랄한 비판을 했었어요. 독자지만 우리의 이야기가 작품에 얼마나 영향을 줄까? 그냥 피드백 정도겠지? 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저희 얘기를 듣고 대본을 다 바꾸다시피 하신 적이 있어요. 이게 이렇게 된다고? 싶었죠.
권지윤
여기서 만나는 예술가들을 대부분 ‘쌤’이라고 불러요. 가장 편한 호칭이라서 그런 건데, 사실 그분들이 선생님인 건 아니잖아요. 저한테는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태도가 되게 중요해요. 저도 상대에게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요. 홍민기 작가님은 만나는 사람에 따라 태도가 딱히 다르지 않은 분이셨어요. 청소년과 예술가라는 구분보다는 업으로서의 비예술가와 예술가라는 구분 정도만 가졌던 것 같고, 그 부분이 잘 맞아서 청예탐 이후에도 여러 작업을 함께 했어요. 이 경험을 통해 한쪽만 예술의 씨앗이 있어도 예술로 충분히 대화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청소년이든 할머니든 우리 모두는 예술로 대화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구나.
소년들의 모험을 담은 <타조 소년들>(ⓒ국립극단)
Q6
청소년극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게요.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을까요?
황웅비
<타조 소년들>이요. 5년 전에 봤는데도 무대랑 배우분들 얼굴까지 선명하게 기억이 나요. 저는 유머러스하고 매너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철부지 같은 모습을 숨기려고 나를 꾸미지만, 혼자가 되면 그렇지 않은 저를 보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타조 소년들>의 “로스를 로스로”라는 대사가 저에게는 ‘너는 너답게 편하게 살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그 이후로 ‘사람들 사이의 나’와 ‘혼자 있을 때의 나’가 같은 ‘나’라고 여기게 됐어요.
권지윤
사회가 청소년에게 기대하는 프레임이 있잖아요. 청소년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해요. 혹은 벗어나기 위해서 투쟁하거나. 청소년극이니까요. 그리고 어떤 콘텐츠든 인물을 창조하는 것은 아주 무거운 작업이고, 그렇다면 적어도 ‘나는 이 아이를 사랑하고 자유롭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야 좋은 결과물로 이어진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좋았던 작품이 <좋아하고 있어>이고, 아쉬웠던 건 <말들의 집>이에요.
Q7
나와 닮았다고 느낀 인물이 있었나요?
권지윤
처음으로 닮았다고 생각한 인물은 <오렌지 북극곰>의 지영이었어요. 청소년극을 본 경험이 많지 않기도 했고, 저와 같은 중학생의 이야기였거든요. 마냥 숨고만 싶던 때라서 엄청 공감했어요. 생리, 가족, 학교에 대한 이야기에 오열했고, 극장에서 나온 후에도 그랬어요.
황웅비
<타조 소년들>의 로스는 ‘저런 모습이 되고 싶다’였던 것 같고,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의 시라노는 사랑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현실의 저랑 너무 닮았어요. <오렌지 북극곰>도 비슷했어요. 저는 남자인데도 지영의 이야기가 더 와닿았어요. 신체가 변한다는 점에서 남자 역시 같잖아요. 제가 지금까지 본 캐릭터 중에서는 한국 청소년이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 지영이가 아니었나 싶어요.
Q8
작품이 여러분의 고민이나 감정을 대변한다고 여겨졌나요?
황웅비
대체로는 그랬지만, 우리의 일상을 담은 이야기라고 생각한 작품에서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 경우도 있었어요.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고민의 문제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인물이 가진 고민과 그 고민에 대한 반응들까지, 만드는 이들이 얼마나 깊게 고민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죽고 싶지 않아>는 대사가 거의 없었지만, 움직임만으로도 공감했거든요. 그 자체로 힘이 되기도 했고요.
권지윤
저는 결과 중심적인 사람인데, 이 활동을 통해서 과정의 중요성을 배웠어요. 웅비가 말한 것처럼, 워크숍에서 우리랑 예술가들이 얼마나 동화되어 놀았느냐가 프로덕션이 만든 공연에 보이는 것 같았어요. <봉천동 카우보이>라는 작품이 생각나는데요. 솔직히 희곡은 제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통제된 상황 안에서 자유를 찾는다는 주제에는 공감했거든요. 제가 자유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던 사립 미션 스쿨을 다녔어요. 그 경험 덕분에 극에 엄청 몰입하게 됐어요. 하지만 어떤 작품은 저와 많이 닮고 공감할 지점도 있었지만, 인물을 대하는 태도가 극단적이라서 불쾌했던 기억도 있어요.
표류하는 청소년의 단상, <오렌지 북극곰> 2018년 공연(ⓒ국립극단)
Q9
청소년기에 청소년의 고민을 담은 연극을 봤어요. 공연을 보며 여러분의 고민도 해결이 되었나요?
권지윤
오늘 인터뷰를 하러 오면서 청소년기에 청소년 서사를 극의 형태로 봐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인물에 공감한다는 건 타인에게 공감하는 것과 다르게 자신의 페르소나를 발견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3년간 청소년극을 보면서 계속 저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물론 영화에 나온 청소년을 보고도 느낄 수 있지만, 공연예술에는 체험적인 요소가 있어서 더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배우가 나와서 누군가를 연기할 때, 저는 그 사람을 진짜로 만난 거잖아요. 그 감각이 너무 중요해요. 처음 본 사람인데도 내가 상대의 행동과 말, 상황에 공감해서 울고 웃는 것. 현실에서는 관계를 맺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까지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해요. 그런데 연극은 그걸 압축해서 경험하게 하거든요.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경험이 정말 중요한데, 실천하기 힘든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연극은 어쩌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존재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황웅비
어릴 때는 ‘청소년극이면 청소년이 쓰고 청소년이 연기해야 되는 거 아닌가’ 라는 1차원적인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제가 직접 경험하면서 청소년극은 청소년이 청소년에게 혹은 어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어른들이 청소년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은 것들을 이야기하는 장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저는 고민을 혼자 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직접적으로 ‘나 이런 고민이 있어. 이거 어떻게 해야 할까’를 말하지 않아도, 비슷한 고민을 갖고 살아가는 인물을 보고 극에 몰입함으로써 내가 가진 고민도 해결되는 느낌이었어요.
Q10
진로나 가치관에도 영향을 준 부분이 있나요?
황웅비
저는 솔직히 큰 편입니다. (웃음) 원래도 배우의 꿈을 갖고 있었는데, 무대 위 배우에게 공감하고 위로받은 경험이 너무 소중해져서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경험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더 하게 됐어요. 특히 연극은 몇 시간이나 되는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조용히 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각오를 하고 오기 때문에 관객은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 같아요. 저도 들어주는 이들을 위해서 고민과 생각을 잘 전달하고 싶어요.
권지윤
여기서 연극도 많이 보고 움직임도, 사운드도, 미디어 아트도 접했잖아요. 지금은 영화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이 경험이 없었다면 영화라는 사고에만 갇혔을 거예요. 저는 전부를 걸지 않으려고 해요. (웃음) 특히 예체능을 하면 자기 분야가 최고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저는 그러고 싶지 않거든요. 제가 제일 무서워하는 게 자의식 과잉이에요.
Q11
성인이 되어 청소년기를 생각해보면 어떤 마음이에요?
황웅비
‘그때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산 거지?’ 싶을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참 순수하고 패기 넘치고 열정적이었구나 싶어요. 성인이 된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요즘 애들이 쓰는 유행어를 잘 모르겠더라고요. (웃음) 저희의 청소년기에 할 수 있었던 이야기가 있었고, 지금의 청소년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권지윤
저는 아직도 고등학교 때 이야기를 하고 싶고, 그때의 정서가 담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어요. 대신 제가 고등학생이던 때와는 같지 않은 것 같아요. 다르다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같지도 않은. 나를 증명하기 위해 빛나는 성취 같은 게 필요할 수도 있지만, 그런 걸 다 떠나서 청소년기를 떠올리면 그냥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싶어요. 그리고 전 제가 아직 청소년이라고 믿고 있어요. (웃음)
인터뷰이에 대하여

권지윤과 황웅비는 중3부터 고2까지, 청소년 대상 국립극단 프로그램에 참여해 다양한 예술 활동을 경험했다. 성인이 된 후 현재 대학에서 권지윤은 영화를, 황웅비는 연기를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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